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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강, <노랑무늬영원> 리뷰 2016.09.08

한강, <노랑무늬영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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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는 외로운 이들이 등장한다. 불화를 겪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언니를 보낸 동생('회복하는 인간'), 육아와 회사일을 병행하는 가운데 무심한 남편에 지쳐가는 여자('훈자'), 메마른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말을 듣지 않는 왼손을 가진 남자('왼손'), 교통사고로 손이 으스러져 생의 의미를 잃어가고 방황하는 여자('노랑무늬영원') 등등.. 쓰여진 시기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로 다양해서 하나로 묶기는 힘들지만 왜 이 소설집으로 묶어냈을까 싶게 하는 일관된 정서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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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을 그냥 외롭다,라는 말로 갈음해버리면 그게 어느 정도의 외로움인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한강은 그런 점에서 외로운 인간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져 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외롭다. 이를테면 '훈자'의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몇 차례의 실망이 지나간 뒤에야 그 여자는 남편이 직장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는 또래보다 학위가 늦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특별하게 친화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고유한 개성이라고 불러야 할 독특한 무심함이 있었는데, 그 체념에 가까운 무심함 덕분에 어떤 좌절이나 분노도 조용히 비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열정이나 연민, 깊고 끈끈한 사랑까지 침착하게, 씁쓸히 지나쳐갔다.

 그 봄, 그 여자가 자신의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받아들여간 것은 자신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집에서 영원히 일을 하고 가게를 꾸려가야 할 한 사람.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줘야 할 단 한 사람. 

(p.44-p.45)                                                                                                       

 이 소설은 여자가 운전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운전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즉 시작과 끝이 같고 중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녀가 운전을 하면서 떠올리는 상념들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녀의 아이가 했던 말과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라는 대사를 통해 그녀의 아이가 어딘가 다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치지만 그저 견디는 것뿐이라는 그녀에게 더 큰 불행이 닥치게 되는 것일까. 대학시절의 기억, 어린 시절 기른 병아리에 대한 기억들을 통해 우리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성인여성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한 여자의 내면을 엿보게 된다. 마치 품속에 사표를 넣어가지고 다니며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훈자'라는 미지의 세계를 자신만의 안식처로 삼고 있는 한 여자 말이다. (훈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 또한 놀라운 점 중 하나다.)

 

 이번에는 '푸른 돌'을 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아이를 기르고 있는 서른일곱 살의 여자다.

 

 오십여 통의 전화를 모두 끝내고 나자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대체 그건 무엇을 위한 행동이었을까요.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었던 걸까요. 좋은 추억들을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즈음의 일들을 겪지 않은 예전의 나를 불러내려 했던 걸까요. 받아들이기도, 지우기도 어려운 상황과 기억을 그런 식으로 희석시키려 했던 걸까요.

 어찌 됐든 그 후의 한 달은 예기치 않았던 약속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대체로 즐거웠고, 심각한 이야기는 거의 오가지 않았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꼭 한 번, 대학 시절의 은사를 찾아뵈었을 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인간적인 한계를 느껴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그날 지하철역까지 선생님이 나를 배웅 나온 것이 본래 다정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부끄럽게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p.195-p.196)

 

 한 번의 자살시도와 그 후의 행적들과 맞물려 어린 시절 친구의 외삼촌을 짝사랑했던 기억이 교차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남자는 몸도 마음도 남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말한다. 그날, 누군가와라도 연결되고픈 마음에 전화번호들을 누르던 그 날,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그 사람의 목소리였던지도 모르겠다고.

 막상 손에 넣으면 크게 행복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초월적인 존재에게라도 속하고 싶은 약한 마음을 품게 된다. 혼자 내버려져 있는 것에 대해 인간에겐 어떤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게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나 역시 그렇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기에 어색하고 불편하면서도 막상 그런 자리조차 없으면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딜레마 속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노랑무늬영원'은 수록작 중 가장 분량이 긴 작품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를 치지 않으려 핸들을 꺾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여성이다. 별 효험 없는 재활치료와 나빠져 가는 손목의 상태 속에서 그녀는 점점 일상의 사소한 일들(화장실을 가는 것, 컵을 드는 것 등)조차 혼자 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며 남편의 다정함 또한 닳아없어지게 된다. 최악인 점은 그녀가 그림만을 인생의 의미로 생각해 오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이 늘어난 인대나 금 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 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중략.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p.224-p.225)

 

그녀는 작업, 일상 그리고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까지 사랑할 수 없게 되어 텅 비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루하루 절망한다. 그러던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옛 대학친구로부터의 전화다. 친구는 이사간 집에서 사진을 맡기러 사진관에 갔다가 그곳에 뜻밖에 친구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구기동에 사는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그러다 문득 스물네 살의 어느 날에 올랐던 북한산을 떠올린다. 사진을 찍어 준 남자는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힘든 우연히 스쳐지나간 인연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특별한 무언가 있었던 게 아닌데도 자신의 좋았던 시절이나 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아릿함 때문 아니었을까. 추적 끝에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은 인연이 아니었던 아무 관계도 없었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연민을 느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편이 닦달하듯 '살아난 것에 왜 감사하지 않냐'는 말을 할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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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집을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를 잡자면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을 '회복하는 인간'으로 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던 주인공들이 다시금 생명을 향해 회복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실용서나 사회과학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볼 수는 없다. 다만 씌어진 막을 벗겨내고 맨몸으로 그 어느때보다 투명하게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이를테면 차가운 사람에게 더 차갑게 대해서 관계를 끝장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얘기를 청하는 방식이다. 차마 건네지 못했던 솔직한 위로의 말을 입밖으로 내보려 하는 것이다. 그리운 것을 그립다 말하고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말 할 수 있는.

 언젠가부터 우리가 점점 더 외로워지는 건, 점점 더 내 얘기를 하지 않게 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마음을 닫아 잠그고, 그렇게 가면을 쓰고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원치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부터가 꽁꽁 마음을 닫아 버리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지 않을까.

 '노랑무늬영원'의 주인공이 강하게 빛나는 노란색의, 빛이지 아름다움인지 모를 그 점들을 꼭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밝아지기 전에'의 주인공이 쓰던 그 어떤 여자에 대한 소설이 꼭 완성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또한 너무 냉정하지 않으나 쓸 데 없는 시선들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다시금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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